장석룡(張錫龍)
1823(순조 23)∼1907. 한말의 문신. 본관은 인동(仁同). 초명은 용규(龍逵), 자는 진백(震伯), 호는 유헌(遊軒) 또는 운전(雲田). 아버지는 학추(學樞)이며, 어머니는 선산김씨(善山金氏)로 구운(龜雲)의 딸이다.
1846년(헌종 12)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이듬해 사헌부지평과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으며, 1848년 증광문과회시(增廣文科會試)의 시관(試官)을 거쳐 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
해남현감으로 나갔다가 1849년(철종 즉위년)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854년 홍문관부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등의 직을 역임하고, 1857년 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현풍현감에 제수되었다.
1864년(고종 1)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당시의 시폐(時弊)를 지적하였다. 이해에 대사간·예조참의·공조참의·경주부윤이 되었으나 곧 귀향하였으며, 77세에 다시 공조판서·이조참의, 80세인 1892년에 궁내부특진관을 지냈다.
저서로 《유헌집》11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